270mm

송인수
결연 사례 5 :

"270 MM"



나는 축구를 정말 좋아한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했던가. 초등학교 때 그렇게 몸싸움이 싫고, 운동신경이 발달되지 않아서 싫어했던 축구였는데, 교직생활하면서 축구의 매력에 한껏 빨려 들어 버렸다.

그러나 나는 아직 축구화가 없다. 한 두 번 산 축구화는 다 닳아 버렸거나 잃어버렸다. 이 학교로 처음 발령 받은 첫 해에는 다른 축구화가 없어서 함께 운동장에 나오는 동료 선생님의 축구화 한 짝을 빌려 신고(그분은 오른발잡이, 나는 왼발잡이) 축구하면서 버텼고(그날은 참 가관이었다), 그 꼴을 보다 못해 주구발의 대표 한현 선생님이 축구화를 사주셨으나 불행히도 크기가 작아서 못 신다가 그후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지금은 인문사회부장의 축구화를 빌려 쓰고 있는데 새 신발이 거의 중고가 되어 버렸다.

그러던 차에, 지난 주 목요일 저녁, 쉬는 시간에 아이들이 몇몇 몰려왔다. 나와 결연하고 있는 새롬이와 그리고 화요일마다 성경공부하고 있던 아이들 중 몇몇, 그리고 예상 바깥의 재갑이라는 아이- 그 아이는 반에서 일등하는 이야기인데, 뺀질 뺀질한 아이로 정평 난 아이였다-.

새롬이는 싱글벙글 거리고 있었고, 다른 아이들도 표정이 무척 밝았다.
무슨 일인가 놀라는 나에게 아이들이 말했다.

"선생님. 이거 받으세요."

아이들은 나에게 검은 보따리를 불쑥 내밀었다. 눈으로 보기에는 무엇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것은 그렇고, 스승의 날도 아니고 2학기 끝날 때도 아니고 그냥 아무런 의미 없는 학사 일정에 느닷없이 왠 선물?

열어 보니 축구화였다. KIKA 브랜드에, 공과 부딪히는 접촉 부분이 니스를 칠한 듯 번쩍 번쩍이는 폼 나는 축구화였다. 아이들이 내가 축구화 없는 줄 어떻게 알았는지...

"너희들이 웬 일이니. 이런 선물을 다하고"
"예, 그냥 준비했어요. 한번 신어보세요."

아이들은 모두 교무실 내 주변에 빙 둘러서서 내가 신발을 꺼내 신는 모습에 연실 싱글거리며 보고 있었다. 270MM. 신발은 너무도 정확히 맞았다.

"야, 이놈들아, 고맙구나."

난생 처음이었다. 이렇게 학기 중 특별한 계기도 없이 아이들에게 선물을 받기란. 아이들은 한참 그렇게 내가 신발 신고 이리저리 걸어다니는 모습을 보며 재미있어 하다가 교실로 올라갔다. 그때 새롬이가 귓속말로 내게 말했다.

"선생님. 어제 제가 영등포에 가서 신발 샀어요.
그리고 저, 신발 주머니 속에 제가 쓴 편지가 있어요. 나중에 읽어보세요."

힐끗 보니 하얀 편지지가 눈에 띄였다.

정말 너무도 기쁜 하루였다. 우리 반 아이들에게 대답 없는 짝사랑을 일방적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이제는 이런 일방적인 관심도, 타성에 젖기 쉽고 늘어지기 쉬운 지금은 11월인데, 이 축구화 한 켤레가 갑자기 내 학교 생활을 바꾸어버린 듯한 기쁨... 더욱이 그 망나니 같았던 결연 아이 새롬이가 그 기특한 짓을 주동했다니...

교무실에 한참동안 축구화를 신고 걸어다니며 여러 선생님들에게 팔불출 같이 자랑했다.

"저기 새롬이 하고 몇 놈들이 이거 사주었어요. 하하하."

"애들이 아는가 봐요. 선생님 고생한 것..."

"난 알고 있었죠. 아이들이 며칠 전 선생님 책상 쪽으로 와서 신발 크기를 재어 가더라구요. 담임 선생님에게는 이야기하지 말라고 해서 가만있었어요. 마음 속으로는 아 저 선생님 축구화 하나 생기겠구나 하고 생각했죠."

주변 선생님들이 한마디씩 하셨다.

나는 수업이 없는 시간, 마치 대학 일학년 때, 내가 좋아했던 여자 친구로부터 첫 번째 love letter가 올 때의 그 설레임으로 편지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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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 새롬이에요. 오랜만에 편지 쓰네요.
요즘 날씨도 추우신데 옷 따듯하게 입으세요. 저희들끼리 돈을 모아서 선생님께 선물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저와 재갑, 재훈, 순식, 유일, 재혁, 정구, 만우, 성호, 상태, 상형이 이렇게 애들끼리 돈을 모아 선생님 축구화를 하나 샀습니다. 저희들이 샀으니까 잘 신으세요.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입이 귀에 걸려 있잖아요. ㅋㅋㅋ.
신발 있다고 맨날 신나서 축구하시겠네요.
금요일 날 1교시 때 축구화 산 기념으로 (영어 수업 제끼고) 축구 한번 해요. 애덜도 바라고 있으니까요.
저랑 유한준이랑 영등포 가서 선생님 축구화 샀어요. 제가 고른 거에요. 미리수 크시면 말씀하세요. 제가 바꿔드릴테니께요.
사랑하는 제자 새롬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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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리 명작문은 아니지만, 편지를 썼다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아이의 편지였기에 잘 접어서 학급 경영 파일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젠 이 아이를 내 품에서 떠나 보내도 될 때가 됐구나... 그토록 포기하려고 했던 아이인데 이런 기적도 다 있구나 하는 생각. 아이는 수십번도 더 바뀔 수 있구나, 고 2일지라도...

그나저나 그놈은 언제부터인가 편지나 메일을 보낼 때는 꼭 이런 말로 끝을 맺는다.

"사랑하는 제자 새롬이".

"사랑하는..." 남자 제자에게 듣는 말이라, 징그럽고 낯간지럽지만 유난히 그 날은 그 말이 살겹게 다가왔다.

내일 영어수업 시간에는 새롬이 말대로, 운동장에서 축구화를 신고 누벼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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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1.21
12:24:08 (*.250.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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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태

2000.11.30
00:00:00
(*.184.246.189)
교사로서 축구인으로서 선생님이 부럽습니다.
그런 축구화 신고 공을 차면... 몸이 날아가겠죠? [11/21-13:52]

김덕기

2000.11.30
00:00:00
(*.43.82.198)
축하드립니다. 좋은 교사, 좋은 학생, 좋은 만남입니다...올 겨울에도 한강 이북 vs 한강 이남, 270mm 대 260mm의 시합이 기대됩니다. [11/23-13:19]

안미정

2000.11.30
00:00:00
(*.59.0.87)
너무 부럽습니다. 선생님 흰 머리 하나하나 마다 아이들에 대한 수고와 힘씀이 담겨있었던 거군요. [11/25-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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