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방학과제로 사이버상에서 모둠일기를 쓰라고 했다. 매일 쓰는 게 일기인데, 우리반 아이들은 어쩌다 가끔 자기들 기분 내킬 때 일기를 쓴다. 방학과제라면 그렇게도 싫어하던 나, 특히 방학일기는 밀려 쓰는 게 습관이 되었었던 나. 어쩜 나 어릴 적 모습과 그리도 비슷한 지.... 아이들은 담임 닮는다고 누가 그러더니만...
방학 중 아이들이 기분 내킬 때 써내려간 일기 아닌 일기를 읽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부분 방학이 재미없다거나 지루하다는 반응들이다. 빨리 학급등교일이 왔으면 좋겠다고 난리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고대했던 방학인데... 나의 머리로는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 1학기 동안 담임과 함께 했던 시간이 너무 좋아서 폐인 현상을 보이는 건 아닐까...? 역시 한 학기동안 아이들에게 함께했던 시간이 헛되진 않았구나!’
그러나 나의 이런 아이들에 대한 믿음은 헛된 망상이었음을 곧 깨달았다. ‘선생님 보고 싶었어요. 방학 어떻게 보내셨어요?’ 등등 아이들이 나에게 매달리며 안부를 묻는, 조금은 친근하고 소란한 모습을 기대했건만, 등교일에 아이들은 오자마자 빨리 끝내 달라고 아우성이다. 빨리 끝나고 자기들끼리 놀러 가고 싶다는 거다. 혼자서 김치국만 마신 셈이다. 내가 왜 아이들의 심리를 아직도 눈치 채지 못 했을까? 괜시리 아이들이 야속해진다. 학교에 덩그러니 혼자 남아있는 담임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들끼리 히히덕거리며 저 멀리 교문을 나선다.  
‘완전 배신이야, 배신! 다시는 이 녀석들을 믿지 않으리라.’
혼자만 버려진 듯한 그 때의 기분! 무척 씁쓸했다.

개학일. 교실에 들어서려는데 방학 중 등교일 이었던 8월13일이 기억났다.
‘이 녀석들이 날 반가워하지 않겠지?’
입을 굳게 다물고 굳은 얼굴로 교실에 들어섰다. 첫 시간부터 아이들을 확 휘어잡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꽂히며 밝고 활기찬 인사소리가 들렸다.
순간 너무나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과 교사가 신뢰가 아니면 그 어떤 것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아이들을 믿지 않고 분위기를 잡아보려고 했던 얄팍한 생각이 앞섰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그러면서 아이들 얼굴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이 많이 변한 것 같았다. 새까맣게 얼굴이 탄 아이, 한달 사이에 키가 훌쩍 커 버린 아이, 머리 스타일이 바뀐 아이, 여드름 꽃이 피기 시작한 아이...  
서른다섯 명 아이들은 저마다 1학기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자란 모습을 보며 잠깐이지만 아이들을 믿지 못하는 나의 자라지 못한 모습을 아이들이 알아 차릴까봐 조마조마했다.
‘내가 어찌 이 아이들을 믿지 않을 수 있으랴. 처음 만났을 때 각오했던 것처럼 이 아이들을 마음껏 사랑하는 2학기가 되도록 노력하자. 순간순간 배신으로 갚아주는 녀석도 있겠지만 첫 마음을 잃지 말자. 담임의 마음도 몰라주는 이 무딘 녀석들아! 난 끝까지 너희들을 사랑하고 믿어보련다. 한번 속았는데 두 번은 못 속겠니? 짜~식들...’
내 입가에 미소가 번져가면서 짧은 순간 스쳤던 많은 생각들을 뒤로하고 경쾌한  소리로 인사를 했다.
“방학 잘 보내고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니 반갑구나. 잘들 지냈지? 방학 숙제는 다 했는고?”
“으~~~~또 숙제얘기.....”

한 여름 시끄러운 매미의 울음 속에 아이들의 소리가 파묻히면서 2학기의 첫 시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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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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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댓글

이형순

2004.09.21
12:24:32
(*.204.46.194)
위의 글은 2004년 9월 23일 교육신보에 실린 내용입니다...

장현건

2004.10.01
11:56:13
(*.95.24.70)
우와! 교육 신보에 기고까지!! 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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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13년 4월 11일 회복적 대화를 하고서 [7] 297     2013-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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